호랑이의 정원 열아홉 번째 뉴스레터 2021.12.17 발행 안녕하세요 <호랑이의 정원>에서 발행하는 격주 뉴스레터 <호랑이의 쪽지 19호>입니다. 이번호에서는 애국가의 가사로 친숙한 남산의 소나무에 대해 다루었답니다. 사실 12월에는 홍릉숲(홍릉시험림)의 호랑가시 나무를 보러가기 위해 계획을 잡아뒀는데 12월부터 3월까지 숲해설이 쉬더라구요 ㅠㅠ흑흑 소나무는 너무 양이 방대할것 같아서 아주 나중으로 미뤄두려 했지만 이번 기회에 살짝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19호는 2021년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호랑이의 쪽지랍니다. 약간의 겨울방학을 보낸 후에 내년 호랑이해에 호랑이의 쪽지 시즌3가 다시 시작됩니다. 추운 겨울동안 건강 조심하시구 따뜻한 연말연휴 보내세요! 어흥 호랑이의 식물산책 남산 소나무 소나무 좋아하세요? 산림청과 한국갤럽이 2014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1위가 소나무라고 합니다. 흔히들 소나무는 한국인의 삶의 동반자로 비유되곤 하는데요. 한국인은 예로부터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 금줄을 치고, 소나무 가지로 불을 때서 밥을 먹고, 죽은 뒤에는 소나무 관에 들어가게 된다는 조금은 낭만적인 비유를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대한민국은 이제 다민족국가로 민족성을 강조하는 것은 맞지 않는 얘기지만요.) 소나무는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로 가족이나 친구처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근한 존재여서 좋아한다는 사실을 크게 인지못하고 지내는 나무가 아닐까 싶어요. 남산의 소나무는 역사가 무척 길답니다. 조선 실록 곳곳에서도 남산의 소나무를 보호해야한다는 언급을 볼 수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남산은 안산(案山: 앉아서 바라볼때 눈높이보다 낮은 산)의 역할을 하므로 소나무가 풍성해야 조선왕조의 평안이 오래 갈 것으로 믿었다고 합니다. 남산을 포함한 성안과 성밖의 산들 일부를 나라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산인 금산(禁山)으로 지정해서 소나무를 보호했습니다. 이후 아래에 후술할 송충이의 피해가 심각할 때에는 나라에서 제사도 지내고, 백성들을 동원해서 송충이를 잡는 등 소나무 보호를 위해 힘썼답니다. 일제강점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소나무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흔히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남산의 소나무를 전략적으로 채벌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곤 하는데요. 관련 글을 찾아보면 일제가 소나무를 없애기도 한 것은 맞지만 여러가지 복잡다양한 이유로 소나무가 기피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 박사인 전영우선생님 글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많은 이유는 땔감으로 쓰기위해 낙엽을 전부 땅에서 긁어냈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소나무 씨가 잘 자라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농경사회에서 활엽수들은 생활에 쓰음새가 많아 결국 침엽수인 소나무가 우리땅에 많이 자라게 되었다고 하네요. 식민정부는 소나무가 송충이의 피해를 많이 입자 소나무 이외에 다양한 활엽수를 많이 심는 수종의 변화를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소나무를 없앴다는 이야기가 나온 듯합니다. 좌) 소나무에 V자형 상처를 내 송진을 채집하는 통, 출처: 산림청 우)인천 강화군 석모도의 송진채취피해 소나무, 출처:국립산림과학원 그렇지만 실제로 일제가 소나무를 많이 훼손한 것도 사실이긴 하답니다. 일제는 소나무 송진을 끓여 송탄유를 만들기 위해서 소나무를 V자로 크게 상처내고 송진을 채취했음이 최근 밝혀졌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송진을 채취하느라 계속 소나무에 상처를 내곤 했지만요. 국립산림과학원의 조사에 의하면 송진 채취 흔적이 있는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해보니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 1945년에 특히 집중되어 있다고 하네요. 송탄유를 항공유로 쓰려고 시도했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해방과 한국전쟁 후 애국가에 나오는 우리의 기상을 살리기 위해 벌거벗은 민둥산이 된 남산에 소나무를 다시 심기 시작합니다. 식목일이면 남산에 대대적으로 나무를 심고 가꾸었으며 1968년부터 2004년까지 소나무숲의 출입을 통제하여 소나무숲을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특히 1990년대에 남산 제모습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소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 이승만 대통령 85회 탄신기념 남산 소나무 식수, 1960.03.26 출처:서울특별시 ![]() 제19회 식목일 기념 남산 5천그루 묘목심기 행사, 1964.04.05 출처: 서울특별시 ![]() 남산 외인아파트 출처: 중앙일보 ![]() 1994년 폭파된 남산 외인아파트 출처: 중앙일보 남산의 소나무숲 탐방로는 소나무로 가득한 숲인데요. 원래 이곳 앞 쪽은 1972년 외국인을 위해 완공된 남산외인아파트가 있던 자리로 1994년에 폭파하여 철거되었답니다. (약간 곁다리로, 외래유입종 식물중에 발견지와 발견연도가 확실히 밝혀진 서양등골나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하얗게 피는 국화과 풀로, 1978년 남산에서 발견되었는데 외국인의 남산 방문 혹은 호텔 출입으로 인해 추정된다고 합니다.) 이 외인아파트 자리는 현재 남산 야외식물원로 바뀌었으며 뒷편의 소나무숲 탐방로와 하얏트호텔 주변의 소나무숲으로 이 주변은 소나무로 가득하답니다. (하얏트 소나무숲-야외식물원-남산둘레길-해방촌으로 내려와 무언가 사먹기가 저와 친구의 최애 산책코스입니다!!) 하얏트호텔 주변에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전국의 소나무를 심은 팔도 소나무 단지가 있는데 특히 충청도를 대표해서는 그 유명한 정이품송의 맏아들? (신화도 아닌데 맏아들이 그렇게 중요한걸까요? 🤔ㅋㅋ) 소나무가 이곳에 와있답니다! ![]() 왼쪽에 보이는 나무가 속리산 정이품송 맏아들나무 ![]() 겨울에도 푸른잎이 아름다워요 ![]() 구불구불한 남산의 소나무 숲 ![]() 소나무재선충병 전자예찰함 남산 소나무숲 탐방로 접근성 -도보로 야외식물원에서 남산타워 방향으로 올라가는 길에 접근 가능 -도보로 남산 서울타워 정류장에서 국립극장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접근 가능 -휠체어, 유아차 접근 불가 (야외식물원과 팔도소나무단지는 이용가능)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 없음 소나무(Pinus densiflora)는 우리나라 어디에서 볼 수 있는 상록 침엽수로 일본, 중국 일부와 러시아 일부지역에 분포한다고 하네요. 미국에도 파인트리가 있는데! 유럽에서도! 싶지만 식물학적으로 우리가 소나무라고 부르는 위의 종은 굉장히 한정된 지역에서만 분포한다고 하네요. 소나무에 대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식물학에 약한 일반인인 저는 온갖 종 분류에 헷갈리기 시작했답니다. 일단 소나무는 잎이 2개씩 모여나는데 소나무와 비슷해보이는 잣나무는 잎이 5개가 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남산의 소나무를 살펴보니 40년간 관리되어온 소나무숲 속의 소나무들은 잎이 2개씩 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답니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술이 한 나무에 피는데요. 암꽃부분이 자라서 우리가 아는 솔방울이 됩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소나무는 여러 종이 있는데요. 우리가 생각하는 소나무하면 비정형의 조금은 구불구불한 모습을 가졌다면 강원도와 경북에 분포하는 금강송 (Pinus densiflora f. erecta) 크고 곧아서 건축자재로 많이 쓰인답니다. 봉화의 춘양역을 통해 전국각지에 분포되었기 때문에 춘양목이라고도 많이 부른답니다. 부잣집 정원이나 학교에 조경용으로 심을 것 같은 반송(Pinus densiflora f. multicaulis Uyeki)은 우산처럼 동그란 수형이 특징이랍니다. (호랑이의 정원이 있는 천연동은 조선시대의 지역 구분은 반송방인데요, 이곳에 멋진 반송 나무가 있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요.) 해방이후 많이 심어진 소나무인 리기다 소나무(Pinus rigida)는 북아메리카에서 온 소나무로 3장의 잎이 모여서 난답니다. 우리가 사실 이제까지 많이 본 소나무는 리기다 소나무이거나 리기다 소나무와 테에다 소나무를 개량한 리기테다 소나무일 확률이 높는데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소나무로 1960~70년대에 집중적으로 심어져서 우리 강산을 푸르게 만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점점 사라지는 추세랍니다. ![]() 소나무의 수꽃 출처: 국립생물자원관 ![]() 소나무의 암꽃 출처: 국립생물자원관 소나무와 비슷한 잎 비교 출처: 박원의 전원이야기(링크) 그 많던 송충이는 어디로 갔을까? 이번호에는 어쩌다 송충이에 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찾아보게되었는데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옛날에는 학교에서 시켜서 동네 뒷산에 깡통 하나를 들고 송충이를 잡으러 갔던 추억들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에요. 산업화 시기로 격변하던 때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농사를 천직으로 알던 아버지와 도시에 가고 싶어하는 청년 아들이 밥상머리에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겨!” 하고 싸우는 클리쉐도 생각나기도 하구요 ㅋㅋ 배우 송승헌님의 데뷔 초기에는 숱많고 진한 눈썹이 돋보여서 송충이 눈썹 배우로 많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어느새 송충이 눈썹이란 말보다는 짱구 눈썹이 더 친숙한 말이 되었고, 송충이를 직접 볼 수 있는 경우도 드물어져서인지 송충이 씹은 얼굴이라던지의 관용적 표현은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소나무는 여전히 많은데 그 많던 송충이는 송충이는 어디로 갔을까? 싶어서 제가 찾아본 송충이에 관한 TMI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아마 송충이에 대한 피해 역사는 우리나라의 소나무의 역사와 함께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도 송충이에 대한 피해가 79건이나 기록되어 있답니다. 세종대에는 제릉(齊陵)의 소나무가 송충이로 피해를 입자 바깥 산을 불태워 방제를 하기도 하고, 선조대에는 사직단의 소나무가 송충이로 죽자 관리직원의 소홀이라며 처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숙종대에는 송충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백성들을 동원해 송충이를 잡는데 그칩니다. 정약용이 쓴 다산문집에도 보면 송충이에 대한 피해와 원망을 볼 수 있답니다.(링크) 여주군에서 송충이 한되에 삼전씩 지불 기사, 출처: 조선중앙일보 1933.07.05 송충이의 습격을 받은 소나무, 출처: 조선일보 1964.05.12 송충이의 피해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는데요.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람들을 동원해서 송충이를 일일이 잡는 방제방법이 우선되었습니다. 1914년 송충구체예방규칙이 제정되며 관공서 직원, 학생, 주민들 사실상 대부분 주민 인력이 동원되었는데요. 농번기와 겹쳐서 불만이 커지자 송충이를 잡은 양에 따라 포상을 하거나 추첨을 통해 경품을 지급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김동인의 소설 <감자> 기억하시나요? 소설에서 복녀는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송충이를 잡고 일당을 받는 일을 했었답니다. (그러다 송충이를 안 잡고도 배로 버는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게되고…흑흑ㅠㅠ) 1925년 조선문단에 발표된 소설이니 1910년대 후반~1920년대 초에 어떻게 송충이를 잡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끓었다. 그때, 평양부에서는 그 송충이를 잡는데 (은혜를 베푸는 뜻으로)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을 인부로 쓰게 되었다. 빈민굴 여인들은 모두 다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뽑힌 것은 겨우 오십명이었다. 복녀도 그 뽑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복녀는 열심으로 송충이를 잡았다. 소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는, 송충이를 집게로 집어서 약물에 잡아 넣고 잡아넣고, 그의 통은 잠깐 새에 차고 하였다. 하루에 삼십이전씩의 공전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 이렇게 사람을 동원하는 방법 이외에도 송충이 식용조리법을 공모하고 새우와 닭고기 맛이 난다고 홍보하기도 했지만 호응이 좋지 못했으며, 송충이를 닭 사료나 삶아서 비료로 사용하는 방법이 권장되기도 했으나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또 신기한 방법 중 하나는 유아등(誘蛾燈) 설치인데요. 유아등은 지금의 해충퇴치기 같은것으로 빛으로 솔나방을 유인하여 성충이 되기전에 미리 잡는 방식입니다. 화재의 위험이 있기는 했지만 꽤 효과가 있었던 편이라고 합니다. ![]() 솔나방을 잡는 유아등, 출처: 『조선산림회보』 81 ![]() 유아등의 구조 출처: 『조선산림회보』 148 결국 송충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식민정부는 여러 방법을 강구했고 우리나라의 소나무위주 단순림을 활엽수가 섞여있는 숲으로 바꾸는 방법을 씁니다. 이 과정에서 1910년대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숲의 85%가 소나무였다면 1930-40년대에는 적게는 2%에서 10%이내로 줄이게 되었답니다. 아마 일제가 우리나라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우리민족의 나무 소나무를 베고 아까시나무를 심었다는 설은 여기에서 온 것 같은데요. 일제시대에 많이 들어왔다 알려진 아까시 나무는 1910년대에 조성하다가 추진하지 않으며, 의외로 상수리나무의 비중을 55%까지 늘렸다고 합니다. (도토리묵에 대한 사랑때문에 상수리나무는 일제의 영향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것일까요?) 이후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의 소나무 취향은 소나무잎처럼 변치않고ㅋㅋㅋ 소나무를 계속 심고 또 송충이에 여전히 시달리게 되죠. 1967년 육영수 여사가 직접 깡통을 들고 송충이를 잡기도 했으며 1970년대까지 동사무소, 시청 등 관공서와 국민학생까지 동원되어 송충이 잡기의 역사는 계속되었답니다. 지금도 소나무에는 송충이가 있지만 약품으로 방제가 가능한 수준인데다가 솔잎혹파리나 특히 “소나무재선충” 이라는 큰 해충이 있어서 더이상 송충이는 크게 부각이 되고 있지 않답니다. ![]() 시청직원동원 남산 송충이 구제작업, 1964년 출처: 서울특별시 ![]() 동작동 국립묘지 숲에서 송충이를 잡는 육영수 여사,1967년 출처: 국가기록원 *일제강점기의 송충이 부분은 백선례, 2018 「‘산림의 갱’ 송충이 대발생과 식민정부의 대응」, <<한국문화>> 81 를 요약했습니다. *휴..이정도면 제가 찾은 송충이 정보를 비교적 짧게 줄였는데… 짧게 줄이다보니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단순하게 표현된 부분이 있음을 밝힙니다. 👇 메일의 하단 부분이 잘릴 시 전체 메일 보기를 클릭해주세요. 💌 숭례문의 소나무 2008년 2월 일어났던 숭례문 화재는 꽤 충격적인 사건중 하나였답니다. 저도 그 당시에 저녁에 다 타버린 숭례문을 보면서 참담해 하는 친구들과 모여 숭례문앞 둘둘치킨에서 맥주를 마시며 사실은 숭례문은 한국전쟁때 대부분 소실되어 박정희 시대에 새로 복원된거라 사실 테세우스의 배같은거라고 괜히 아는척 했던 기억이 나네요 ㅋㅋㅋ 어쨌든 지금은 문화재 지정번호 제도가 없어졌지만 국민들에게 국보 1호가 갖는 상징성이 컸던 만큼 어떻게 복원할 것이냐도 꽤 많은 논의가 있었답니다. 이 공사에는 전국의 장인들이 모여서 기와를 새로 굽고, 단청을 새로 그리고 나무를 짜맞추었답니다. 특히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한 목공사가 유명했는데요. 크고 곧기로 유명한 금강소나무를 사용한다고 화제가 되었답니다. 삼척시 준경묘 일대 소나무숲에서 옛 기록에 따라 문화재청장과 종친회, 장인들이 나무를 위해 제사를 지낸 후 “어명이요" 라고 세번 외친 뒤 자르는 이벤트까지 진행했었는데요. 사실 더 크나큰 충격은 숭례문과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해 잘랐던 이 “나무가 너무 좋아 쪼개기가 아까워서” 신응수 대목장이 문화재청에서 제공받은 4그루의 나무를 빼돌렸다는 사실이었죠….부실공사와 비리가 드러나면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도 그 죄가 인정되어 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네요. 출처: 매일경제 2008.12.10 아래부터는 호랑이의 친구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생각을 담은 에세이 형식의 짧은 글입니다. 란과 생활: 천연동 비둘기 최근 저희 호랑이의 정원 작업실앞에 아침마다 비둘기떼가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먹을것을 뿌리는 것도 아닌데 아침마다 구구구 소리를 내며 동네 깡패들처럼 제 앞길을 막고 있는 모습은 조금 무섭답니다. 어느날 아침은 기와장마다 앉은 비둘기들이 털을 부풀리며 제가 오는 것을 지긋이 내려다 보는 날도 있었습니다. 골목이 비둘기털로 지저분해지기도 했구요. 비둘기를 퇴치하기 위해 음파퇴치기라는걸 찾아봤는데 너무 고가여서 포기하고 독수리연을 샀는데 아직 설치하진 못했답니다. 유튜브에는 황조롱이 소리 2시간 연속재생이 있는데 이것을 틀면 비둘기가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 비둘기는 어디서 갑자기 온걸까? 생각해보니 영천시장 주변이 재개발하기전에 비둘기가 많았던 것이 생각났답니다. 원래 그곳은 떡시장이 발달해서 아마 비둘기가 오래전부터 그곳에터를 잡고 많았던 것 같아요. 결국 1969년 발표된 성북동 비둘기의 2021년 버전인 셈인거죠. 동네가 재개발이 되면 그곳을 떠나야하는 사람들과 오래된 건물이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 생각했었는데 비둘기들도 영향을 받고 있었던거죠. ㅠㅠ 며칠을 두려움과 관찰을 한 결과 다행히 저희 작업실을 본거지로 삼지는 않고 옆에 높은 건물이 주 본거지이며 저희 작업실은 특정시간대에 잠깐 이용하는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일본목련에 살고 있는 까마귀와 지붕근처에 살고있는 고양이가 있어서 다행히 비둘기의 습격을 받을 것 같지는 않을것 같습니다만 이 추운 겨울 비둘기에 대한 공포와 애잔함이 공존하는 모순속에서 연말을 보낼것 같네요. <어흥> 지나간 것과 다가오는 것 ![]()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호랑이의 쪽지를 발행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를 생각해봤어요. 가장 먼저 여의도샛강생태공원이 떠오르더군요. 여의도에 간 날은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매우 따가운 여름날이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의 상쾌함 덕분에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방에서 보낸 시간이 서울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훨씬 많지만 도시가 답답하다거나 시골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데요 이렇게 도심 한가운데 조성된 공원에 다녀올때면 무채색의 도시에서 식물이 더욱 소중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맥락에서 호랑이의 쪽지도 구독자분들의 일상에 상쾌한 물결과 페이스트리같은 도시의 층위를 다채롭게 전달할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유정> 후기🍀 어흥: 내년에 하고 싶은 일과 돈을 벌 수 있는 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유정: 2022년!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호랑이의 쪽지 19호는 재밌게 읽어보셨나요? 독자 분들의 후기와 관심이 큰 힘이 됩니다. 💪 이번호의 백미는 역시 송충이 퇴치 역사입니다. 무서운 송충이 사진을 넣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잘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송충이는 언제부터 솔잎만 먹기 시작했을까요. 솔잎이 향긋하기 때문일까요? 호랑이의 쪽지 소개 동네의 식물탐험을 중심으로 호랑이의 친구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생각을 담은 쪽지입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받아보던 쪽지처럼 별 내용이 없더라도 받아보는 순간에 살며시 지어지는 웃음처럼 삶에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호랑이의 정원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방법의 식물경험 서비스를 제공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정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제안하는 일을 합니다. 식물을 중심으로 환경과 마을을 연결하고 아카이브와 역사를 활용한 다양한 워크숍과 실험을 연구하고 진행합니다. 인스타그램: @tygertyger2020 tiger_garden@naver.com 서울시 서대문구 천연동 1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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